어린 시절
루 게릭은 가난한 독일 이민자 가정인 하인리히 게릭과 크리스티나 팩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난 곳은 뉴욕 시 맨해튼의 요크빌이었는데, 출생 당시 몸무게가 무려 6.4 kg 에 달했다. 게릭의 아버지는 장사를 하는 판금기술자였는데, 건강상의 문제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어머니의 몫으로 돌아갔고, 루 게릭의 부모님 두 분 다 야구는 학교에서나 하는 경기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강인한 생활력을 가진 어머니는 어린 루 게릭이 직업 야구 선수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릭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하면서도 운동만은 꾸준히 하였습니다. 축구, 미식축구, 농구, 체조, 야구 등 거의 모든 운동을 하였고 뛰어난 운동실력을 보여 주었습니다. 맨해튼 워싱턴 하이츠에 있는 PS 132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1921년에 졸업했습니다. 게릭이 고등학교 졸업반이 되었을 때 게릭의 어머니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루 게릭의 가족에게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루 게릭의 야구 생활
루 게릭이 야구 선수로 처음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된 것은 1920년 6월 26일 컵스 파크에서 치러진 경기에서의 활약 때문입니다. 1만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루 게릭이 속한 뉴욕 상업 학교 팀은 시카고의 레인 기술 학교와 경기를 벌였습니다. 8 대 6으로 뉴욕 팀이 이기고 있던 9회초 공격에서, 루 게릭은 18세 고등학교 학생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힘으로 메이저 리그 구장 밖으로 날아가는 만루홈런을 쳤습니다.
루 게릭은 1923년 시즌 중반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에 입성을 하게 되는데, 그의 첫 메이저 리그 야구 경기는 1923년 6월 15일 경기였고 대타로 출전했습니다. 처음 두 시즌 동안 주로 대타로 나서며 많은 출장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정규 리그 경기에서는 23경기밖에 나오지 못했고 1923년 월드 시리즈 출장선수 명단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25년이 되어서야 437타수 동안 0.295의 타율과 20개의 홈런 그리고 68타점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27년 루 게릭은 타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의 하나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 해 218개의 안타를 치면서 0.373의 타율, 52개의 2루타, 18개의 3루타, 47개의 홈런과 175 타점을 기록했고, 장타율은 무려 0.765(7할 6푼 5리)에 이르렀습니다. 117개의 장타는 베이브 루스가 1921년 기록한 119개에 이은 역대 2번째 기록이고, 447 총루타는 1921년 기록한 베이브 루스의 457루타와 1922년 로저스 혼즈비가 기록한 450루타에 이은 역대 3번째 기록이었습니다. 1927년 루 게릭의 엄청난 타격 행진에 힘입어 양키스는 110승 44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하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 겨룬 1927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4승 무패의 기록으로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에 뽑혔지만, 루 게릭의 1927년 시즌에 대해 베이브 루스의 60홈런과 그 당시 뉴욕 양키스의 타선이 리그 전체를 압도할 정도로 강력했던 '살인 타선'(Murderer's Row)인 이유를 들어 그 가치를 절하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루 게릭은 많은 부상을 이겨내며 2,130 연속 경기 출장이라는 기록을 세웠으나, 1938년 시즌 중반이 되자 루 게릭은 야구 선수로서 성과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고, 1939년 시즌이 시작할 무렵 몸은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루 게릭의 병
루 게릭의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게 되자, 게릭의 아내 엘리너는 미네소타주 로체스터에 있는 유명한 메이요 클리닉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결국 찰스 윌리엄 메이요 박사와 통화를 하게 되는데, 그는 루 게릭의 놀라우리만치 급격한 근력의 감소에 관해 예의주시 해오던 차였습니다. 1939년 6월 19일에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루 게릭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병의 예후는 암담했습니다. 급격한 전신 마비의 증상이 늘어날 것이고 음식을 삼키거나 대화하는데 지장이 심하고 향후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뉴욕 양키스는 1939년 6월 21일 루 게릭의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을 진행하면서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였습니다.
" 팬 여러분, 지난 2주 동안 제가 앓고 있는 질병에 관해서 들으셨겠지요. 하지만 오늘, 저는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운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야구장에서 17년이나 뛰었고 팬 여러분들로부터 친절과 격려만을 받았습니다.
이 위대한 사람들을 보십시오. 당신들 중 누가 그들과 함께 한 일생의 찬란한 순간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저는 운이 좋습니다. 누가 제이콥 루퍼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한 위대한 제국의 창시자 애드 버로우는요? 6년 동안 함께한 놀라운 작은 친구 밀러 허긴스는요? 뛰어난 리더이며 심리학의 영리한 학생이자 오늘날 최고의 야구 감독인 조 매카시와 함께한 9년은요? 그렇습니다. 저는 운이 좋습니다.
이길 수만 있다면 오른팔을 잘라내어도 아깝지않을 팀, 우리쪽도 마찬가지이겠지만, 그런 팀인 뉴욕 자이언츠가 선물을 보내주었다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죠. 구장관리인 이하 하얀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당신을 트로피와 함께 기억할 때 그것은 의미 있는 일입니다. 자신의 딸이 사위와 말다툼을 할 때도 사위편을 들어주는 멋진 장모가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입니다. 당신을 가르치고 키우기 위해 평생을 바친 부모님이 계시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힘의 근원이 항상 되어주고 당신이 가능하다고 꿈꿨던 것보다 더 많은 용기가 생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아내가 있다면-그것은 제가 아는 최고의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고통스러운 질병을 앓고 있지만, 위대한 삶을 살았다고 말씀드리면서 연설을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마지막 1년
게릭은 늘 그렇듯, 조용히 그리고 충실히 그의 의무를 이행해 나갔습니다. 게릭은 감독관 업무를 행하면서 종종 아내인 엘리너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는데, 공문에 서명을 할 때면 그녀는 게릭의 손을 잡아주면서 도와줬다. 죽음을 앞둔 한달 전쯤, 게릭은 이제 더 이상 몸이 직무를 수행해 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미치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1941년 6월 2일 밤 10시 10분, 윌리 핍 대신 1루수로 출장한 그 날 이후 3년이 지나 루 게릭은 뉴욕 브롱크스 필드스턴지구 델라필드가 5204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엘리너 게릭은 루 게릭이 죽은 다음, 재혼하지 않은 채 남은 평생을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연구를 지원하는 일에 바쳤습니다. 엘리너는 자신의 80번째 생일인 1984년 3월 6일에 사망했으며, 게릭 부부 사이에 아쉽게도 자녀는 없었습니다.
뉴욕 양키스는 1941년 7월 6일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쪽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웠습니다.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야구 선수는 영원히 기록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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